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재 위치

  1. 인문

절대를 찾아서

() 해외배송 가능

기본 정보
도서명 절대를 찾아서
저자

월프레드 세시저 지음 | 이규태 옮김

출판사 우물이있는집
정가 17,000원
발행일 2003년 02월 28일
사양 518쪽 | 681g
ISBN 9788989824121

아랍 여행기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책은 월프레드 세시저가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엠티 쿼터'라는 사막을 횡단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그 전까지 이 사막은 유럽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현대문명의 때가 물들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5년간의 아랍 유목생활 체험이 과장없이 담담한 어조로 담고 있다.

낮과 밤의 극심한 온도 차, 타는 듯한 갈증, 때로는 낙타를 죽여 식량으로 삼아야 할 만큼 혹독한 배고픔, 아랍 부족들 간의 습격과 약탈, 그에 따른 추적과 보복 등을 포함해 그 사막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배두인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그곳에는 인간의 문명이 아닌, 시간을 초월한 '절대 공간'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주의 실체를 암시하는 것으로 '인류 역사와 문명의 오만함'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와, 때묻지 않은 거대한 사막과 더불어 아랍의 문화를 조명하고 있다.

저자 : 월프레드 세시저

1910년 아디스아바바에서 태어났고 이튼과 옥스퍼드에서 수학했다. 그는 남부 아라비아, 쿠르디스탄, 이라크 남부의 습지, 힌두쿠시 산맥, 캐라코럼 산맥, 모로코, 아비시니아, 케냐와 탕가니타 등지를 탐험했으며, 왕립문학회의 회원이자 영국 학사원의 명예회원이기도 하다.

역자 : 이규태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트리어대학교에서 이집트학과 고고학을 전공했다. 월간 투데이(주) 편집부 기자를 거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어판 객원번역가로 활동했다.

    과학이 보다 발달하여 우주여행이 일반화된다면 우리가 인류문명을 바라보는 관점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으리라. 광막한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푸르스름한 한 점에 불과하고, 그 지표위에 세워놓은 인류문명과 역사가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그것은 우주의 실체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해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있다. 그것은 '사막'이다. 먼 지평선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사막 위에 서는 것은 우주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 일생 동안 한번도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존재한 적이 없는 현대문명인들에게 그것은 '충격' 그 자체일 수 있다. 그 곳은 역사와 문명 밖에 존재한다.
    그곳에는 인간의 문명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절대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우주의 실체를 암시한다. 그 실체가 온몸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인류 역사와 문명의 오만함'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우주―세계라 해도 좋다.―의 실체를 유일하게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거대한 사막'에 대한 보고서이다.
    사막은 왜 역사와 문명을 성찰하게 하는가

    인간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시간 내의 존재'다. 인간은 이 시간성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70년이고, 그것은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찰나 중의 찰나에 불과하다. 이 시간성은 인간의 시야를 결정한다. 그 이상의 시야를 확보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다. 사막은 그 '텅 빔'의 가장 근접한 공간이다. 그 빈 공간에 섰을 때 인간의 시야는 시원과 머나먼 미래를 향해 열릴 수 있다. 사막이 가깝게는 '인생'에 대해, 멀게는 '인류의 역사와 문명' 그리고 '우주의 시원'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아랍여행기의 고전

    이 책은 1959년 출간된 후 서구에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원작인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과 더불어 아랍 여행기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5년간 아랍 유목생활에 대한 체험이 가감 없이 쓰여져 있다. 지금이야 '현대문명에 대한 성찰'이 식상한 화두가 되어버렸지만, 1940년대에 아라비아 사막을 여행하며 그러한 성찰을 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세시저는 단순한 탐험가가 아니라 선각자이다. 그리고 세시저는 로렌스처럼 정치적이지 않다.
    이 책은 로렌스와 같은 정치적 모험 대신 평화로운 여정과 아라비아 사막에서 사는 베두인들의 생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읽다보면 마치 모든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여정이 편안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낮과 밤의 극심한 온도 차, 타는 듯한 갈증, 때로는 낙타를 죽여 식량으로 삼아야 할 만큼의 혹독한 배고픔, 아랍 부족들 간의 습격과 약탈, 그에 따른 추적과 보복이 거대한 파노라마로 그려진 이 책은 아랍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결정판이며, 아랍 풍속의 보고(寶庫)다.

    무소유가 자유와 인간애를 낳는다
    나는 문명세계에서 얻을 수 없는 자유를 사막에서 발견했다.
    소유로 인해 방해받지 않는 삶이 그곳에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아라비아의 사막은 그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무소유'를 강제한다. 저자는 아랍의 유목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무소유'가 가져다주는 자유를 만끽한다. 그곳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 이외에 모든 '소유'는 거추장스럽다. 생존하기 위해서 한 포기의 풀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들에게 많은 소유는 오히려 생존에 걸림돌이 된다.
    문명인에게 '빈곤'의 다른 이름일 뿐인 '무소유'는 자유만이 아니라 깊은 '인간애'를 낳는다. 먹을 것도 물도 없는 거대한 사막에서 타인에게 대추야자 한 알과 물 한모금의 인심을 베풀기 위해서는 허기와 갈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 베두인들의 삶은 감동적이다. 역설적으로 빈곤은 '깊은 인간애'의 토대가 된다. 작은 인심이 주는 만족감은 그 곳에서 보다 극대화된다. 극한 환경에서 풍족한 고기, 깨끗한 물, 달콤한 잠, 모닥불의 따스함의 의미는 생동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아랍인에게 어떤 편견도 갖지 않은 유일한 탐험가 세시저

    세시저 외에도 버튼, 도티, 로렌스, 필비, 토마스 등 서구인으로서 아랍을 탐험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세시저만큼 아랍인에 대해 어떠한 편견도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랍인들의 존경을 받은 탐험가는 많지 않다. 1940년대의 상황에서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서구의 식민지전략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아랍은 서구인, 특히 기독교도들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해있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의 눈으로 볼 때 사막에 사는 아랍인들은 미개했고 빈곤했다. 아랍에 유일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석유'였다. 서구인들은 아랍과 아랍인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오직 '석유'에만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당시의 아랍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약탈을 목도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탐험가들의 목적이 직간접적으로 제국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었다.
    세시저는 제국의 경제적 이익이 아닌 순수한 '탐험의 목적'을 위해 여행했고, 자신이 고용한 탐험대 동료들인 아랍인들과 함께,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자고, 똑같이 맨발로 걸으면서 그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세시저는 탐험에 고용된 '안내인'들을 단지 탐험의 도구로만 생각했던 다른 탐험가들과는 전혀 달랐다. 아랍인 동료들은 그에게 진한 인간애를 안겨 주었다.

    아라비아 사막이 서구화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서구 탐험가

    세시저는 서구문명을 싫어했고, 아랍이 서구화되는 것도 싫어했다. 사막이 강제하는 고난과 금욕, 그리고 따뜻한 동료애를 사랑하여 탐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불편함'이 곧 불행이라는 근대적 사고를 뛰어넘었고, 반대로 과학기술문명으로 대변되는 서구문명의 '편리함'이 곧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깊은 삶의 기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탐험하며 작성한 한 장의 지도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아라비아 사막을 찾아오는 데 도움을 줄까봐 걱정할 만큼 사막을 사랑했다. 그것은 사막을 문명의 쓰레기로 채우는 일일 뿐 아니라, 순수한 아랍인들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을 목도하며 안타까워했다.

    '엠티 쿼터'를 횡단한 세시저

    세시저는 '엠티 쿼터'를 횡단한 탐험가이다. '엠티 쿼터'는 사하라 사막 다음으로 넓은 아라비아 사막의 남부지역을 일컫는다. 세시저는 65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지역을 횡단했다. 그것도 걷거나 낙타를 타고서 해냈다. 이 곳을 걸어서 횡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사막은 마치 블랙홀처럼 어떠한 정보도 외부로 전하지 않고 있었다. 선배 탐험가인 로렌스는 걸어서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영국공군 원수인 트렌처드 경에게 편지를 써서 비행기로 엠티 쿼터를 횡단하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엠티 쿼터를 날아간다면 탐험의 시대를 여는 데 굉장한 선전효과가 있을 겁니다. 엠티 쿼터 탐험은 비행기로만 가능하며 저도 그 탐험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여행은 반드시 걸어서 해야 한다

    사람들은 지질학이나 고고학, 혹은 동식물을 조사할 목적으로 그곳에 갔다. 그들은 대개 차를 타고 이동하며 무선통신을 이용해 바깥세상과 끊임없이 교신했다. 이들은 나보다 훨씬 흥미로운 결과물을 가지고 돌아가겠지만 아라비아의 정신과 아랍인들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위의 글은 다른 사람들의 탐험과 세시저의 탐험이 왜 그렇게 다른 결과를 낳았는지를 설명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세시저는 다른 탐험가들과는 달리 오로지 도보와 낙타만을 이용해 여행했다. 문제는 속도이다.
    사람의 움직임보다 빠른 문명의 이기를 이용한 여행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뿐만 자연환경과 생활방식의 상호 관계 역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여행을 통해서 얻으려는 것이 다른 세계와의 '전면적인 접촉'이라면 여행자의 움직임의 속도는 인간 고유의 속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그 고유한 속도란 '걷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의 여행은 대부분 '속도위반의 여행'이고 그것은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방해하여 여행 고유의 목적을 상실시키고 있다.

    지배자 없는 베두인 공동체

    베두인 부족장들은 부하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여러 평등한 구성원들 가운데 첫 번째 지위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베두인의 사회는 독립된 개인들이 모인 조직체로 조금이라도 독재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면 곧바로 반대에 부딪힌다. 족장의 권위는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인품이 가지는 위력과 사람들을 다루는 능력에 있다. 부족 내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사실상 위원회의 위원장과 같다.
    사막에 사는 원주민을 우리는 무지한 야만인으로 여기기 쉽다. 그들은 현대문명보다 훨씬 열악한 문명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물질문명의 측면에서 현대문명인들보다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문명도 그러할까. 대답은 'NO'다.
    우리는 이 책에서 '족장'은 있지만 '지배자'는 존재하지 않는 부족 공동체를 발견할 수 있다. 국가의 행정력이 점차 미치려 할 때도 원주민들은 한사코 국가의 '보호' 아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부족의 '족장'은 마치 위원회의 위원장 같은 지위로 부족민들에게 권위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베두인들의 부족 사회는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인 생활태도를 유지하는 사회다.
    이러한 문명은 국가 중심의 문명 속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포기되는 지금의 문명보다 훨씬 '역사가 긴' 문명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인류가 원래 가졌던, 지금보다 수준 높은 정신문명의 원형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낙타의 발자국과 똥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베두인 족

    베두인 족에게 낙타는 자신의 생명만큼 중요한 존재다.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낙타는 가축이라기보다는 삶의 동반자라고 해야 옳다. 베두인 족은 사막에 찍힌 낙타의 발자국을 보고 근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두 알아낸다. 베두인 족은 낙타의 얼굴만 보아도 누구의 낙타인지를 알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발자국만 보고도 알아낸다. 발자국의 깊이로 낙타에 사람이 탔는지 안 탔는지, 새끼인지 아닌지를 알아낸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있다. 줄무늬 모양의 발자국은 사막에서 온 낙타의 것이며, 반들반들한 발자국은 자갈밭을 지나온 낙타의 것이다. 베두인은 어느 부족의 낙타인지도 가려낼 수도 있다. 부족마다 키우는 낙타의 종류가 틀리기 때문이다. 또한 낙타 똥의 상태를 보고서 낙타가 어디서 풀을 먹었는지, 언제 어디서 마지막으로 물을 먹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낙타의 발자국을 보고 근처 어느 마을이 어느 부족에게 약탈을 당했는지도 알 수 있다. 텅 빈 사막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원주민에게 큰 정보로 기억된다.

    보복은 있지만 대량 살육은 없다

    그토록 격렬한 싸움과 혼란 속에서도, 그리고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아라비아 베두인들이 오늘날의 영국보다 외부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덜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 글럽 경
    사막이라고 해서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막의 원주민들은 약탈과 보복을 자행한다. 공권력이 없는 대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 원칙이 지켜진다. 보복은 폭력이나 모욕에 대한 복수다. 특이 개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베두인에게 명예를 '침해'하는 일은 용서되지 않는다.
    사막에서의 복수는 언뜻 보면 야만적으로 보일 정도로 잔혹하다. 저자도 처음에는 이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과 생활하면서 이러한 개인적인 보복이 가족이나 부족 전체로 확대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대량살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사람의 목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베두인들을 보면 충격을 받기 쉽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수한 사람을 죽이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잊고 있다. 저자는 문명화된 사람들일수록 사람을 죽이는 데 더 능숙하다고 말한다.

    원주민들의 프로포즈 방식

    사막에 사는 베두인들의 프로포즈 방식은 독특하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어두울 때 옆에 앉아 낙타지팡이를 모래 여자 밑까지 쭉 밀어 넣어 지팡이를 돌려 갈고리가 여자의 몸에 닿게 한다. 여자가 만약 자리에서 일어나 째려보면서 가버리면 프로포즈에 실패한 것이고, 그렇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다음날 여자가 염소를 돌보러 나왔을 때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연애가 이루어져 생긴 사생아들이 베두인들에게는 많으나 베두인들은 사생아들에 대한 어떠한 편견도 없다. 또한 몇 달씩이나 여자를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내면서도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베두인들의 풍속에 대한 정보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