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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루쉰: 위대한 지식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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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도서명 자유인 루쉰: 위대한 지식인의 초상
저자 박홍규 지음
출판사 우물이있는집
정가 13,000원
발행일 2002년 10월 19일
사양 488쪽 | 564g
ISBN 9788989824091

루쉰이라고 하면 낯설지만, 노신이라고 하면 한번쯤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중국현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 혹은 민족주의자로 잘 알려져있지만 그는 사실 문학가이다. 그러나 이 책은 루쉰의 전기이며 평전이다. 어떤 문학적인 관심으로 이 책을 접하게 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루쉰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제 3의 시각으로 루쉰을 해석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저자 : 박홍규

1952년 생으로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공부했다.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서 하버드대 인권연구소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는 영남대학교 법대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철학과 예술을 넘나드는 르네상스적 지식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그는 우리나라에 미셸 푸코와 에드워드 사이드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내 친구 빈센트』, 『오노레 도미에―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자유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 평전』 등 많은 인물서를 펴냈으며 역서로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등 이제까지 30여종에 넘는 책을 냈다.

    나의 적은 상당히 많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
    ―루쉰의 유언 중에서

    당신이 아는 루쉰이 진짜 루쉰인가? 우리나라에서도 루쉰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세계명작소설집에서도 아시아의 대표적인 작가로 루쉰을 끼워 넣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루쉰은 이미 낯선 이름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흔히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 혹은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루쉰의 문학작품이나 잡문을 꼼꼼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라는 틀로 루쉰을 규정하기에는 어딘가 무리가 있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그의 글에서 반사회주의나 반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민중주의자로 규정하자니 반민중주의적 면모가 있고, 전형적인 지식인으로 평가하자니 반엘리트주의적 발언을 하는 사람이 루쉰이다. 이러한 난맥상 앞에서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루쉰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과연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그의 다양한 면모를 무시하고 어떠한 이데올로기의 틀에도 맞지 않는 거인을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 집어넣는 폭력을 행사해왔다. 그러한 왜곡은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지적된 바가 없다. 이 책은 루쉰에 대한 이러한 왜곡을 벗겨내고 루쉰의 참된 정신세계가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야심찬 도전이다.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루쉰 평전

    이 책은 국내에서 발간된 최초의 본격 루쉰 평전이다. 그리고 루쉰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도전하는 세계최초의 평전일지도 모르겠다.
    루쉰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해내는 것은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오히려 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루쉰을 사회주의자로보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있고, 대만에서는 그의「고향」같은 서정적 짙은 작품을 쓴 작가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이렇게 박제화된 루쉰의 이미지는 너무도 견고한 것이어서 감히 이것을 깨뜨리는 평전이 나오기가 어렵다.
    '물에 대해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물속에 사는 물고기'라는 말처럼 루쉰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책은 그 물 밖에서 루쉰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작업이다. 이 책은 최초의 국내 루쉰 평전이라는 가치 이외에도 제3의 시각으로 루쉰을 해석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시각1: 민족주의자로서의 루쉰

    루쉰을 민족주의자로 보는 시각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강하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전사로서의 이미지가 부각된다. 같은 일제강점의 경험을 가진 우리는 루쉰을 민족주의자로 보는 데 인색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반미'를 외치던 80년대 진보진영에서는 그를 민족운동의 교사로 삼았던 것이다. 루쉰은 청년시절 만주족에 의해 한족이 억압받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만주족의 봉건적 억압의 상징인 변발을 자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을 모두 민족주의의 소산으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억압이 있는 곳에 투쟁이 있다’는 명제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중국이 멸망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인류 진보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이 멸망해야 하는 어떤 이유는 인류에게 값진 역사적 가르침이 될 것이요, 그것은 인류 진보의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민족주의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은 국가나 민족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기존의 시각2: 사회주의자로서의 루쉰

    루쉰을 사회주의자로 보는 사람들은 국민당에 맞서 싸운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실제로 그는 국민당의 암살 리스트 맨 앞줄에 놓여있었고 수배상태에 있었던 적이 많았다. 국민당은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을 금지했고, 대만에서도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이 금지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회주의자로 규정지을 수 없다. 루쉰은 생전에 공산당에게 비난받은 적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가 사회주의로 기울었다고 일반적으로 판단되는 시기에도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붓과 혀를 동원하여, 이민족의 노예로 전락하였을 때의 고통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은 물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주의해야 할 게 있다. 사람들이 그런 괴로움을 듣고 읽으며 결코 이런 결론을 내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 그래도 우리처럼 자기 나라 사람의 노예가 되는 편이 훨씬 나아."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억압적인 권력에 대해서는 타민족이건 자민족이건 혹은 국민당이건 공산당이건 투쟁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혁명 후 이러한 말을 남겼다.
    혁명 이전에 나는 노예 짓을 하였다. 그런데 혁명이 발생한 얼마 뒤에 노예들의 속임수에 당하여 그들의 노예로 탈바꿈하였다.
    루쉰의 이러한 면모 때문에 그의 글은 지금 중국인들 사이에서 ‘공산당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사회주의 틀 안에 갇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론: 비판적 자유인으로서의 루쉰

    루쉰은 그 어떤 이념이나 대의 그리고 어떠한 집단에도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어떤 이념이나 대의 그리고 어떠한 집단에도 억압적인 요소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요소를 발견하면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지성인이자, 혁명가―사회주의 혁명가가 아니라―였다.
    루쉰의 가치는 그가 사회주의 혁명에 일조했기 때문이거나 봉건적 사회의 타파에 앞장섰거나 한족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런 일들을 했다면 그것은 그가 사회주의나 민족주의자 반봉건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억압이 있는 곳에서 투쟁’했기 때문이다. 루쉰은 그 억압이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 반봉건주의 내부에 존재하면, 그 내부에서도 투쟁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의 현대적 의미는 그가 ‘참다운 지성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루쉰은 참다운 지성인이란 어떠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실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절대적으로 구속되지 않는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지성인은 ‘자유인’일 수밖에 없다. ‘자유인’은 지성인을 수식하는 필수불가결한 보통명사임을 알아야 한다.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는 루쉰의 이러한 정신의 부산물일 뿐이다.